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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경제 투쟁 특별전
연도 : 1998 전시 날짜 : 08.11~10.31 전시 장소 : 겨레의 집 작성자 : 홍보문화부 작성일 : 2013-08-14 조회수 : 628

독립운동자금후원 활동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발행한

독립의연금·국민회의무금·혈성기금 증서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 미주에서 조직된 대한민국민회는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직접적인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독립군단체 등의 후원에 사용하였다.





























국민의무금 증서





대한독립의연금






혈성금 증서




































일제의 독립공채발매탄압


















▲ 연해주에서 독립공채 모금활동을 한 김용범에

대한 일제의 탄압기사([동아일보]1921.4.20)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돕기위해 독립공채를

발매하다 일경에 체포된 강진구 등 8명에

대한 보도기사([조선일보]1922.12.3)





















▲ 독립금예약서






▲ 독립금기부자 명단을 기록한 독립금공고서






▲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모금한 독립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했다는 기사([신한민보]1944.5.10)
















▲ 독립금영수증












대한민국민회 중앙총회 독립운동의연록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민족경제를 건설하여 주체적인 항일역량을 키우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 다. 이 운동은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김동원 등 기독교계와 교육계 유지 70명의 발기로 시작된 이후,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서울에서 창립되면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민중의 생활향상을 위해 자립적인 민족산업을 육성하고 이를 위해 국산품애용을 실천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실천구호아래 선전강연회와 시가행렬 등을 통한 민중계몽활동과 민족기업육성운동을 전개하 였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1940년 일제에 의해 조선물산장려회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20년동안 일제세기 한국 민중들에게 경제적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이 운동은 비록 사회주의 급진세력으로부터 비판적인 시각도 제기 되었으나, 일제의 식민경제 수탈체제하에서 민족의 생존력 을 유지하며 주권을 회복하려는 경제자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1923년 월 30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제1회 정기총회





▶1923년 2월 16일 서울 경동운 천도교당에서 열린 조선물산 장려회 간친회.

팔도의 토산을 가지고 만든 깃발을 대회정문에 내걸고 물산장려를 결의하였다.






















1924년 2월 5일 서울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장려회의 일주년 기념 서전강연회 광경과 당시의 기독교청년회관













조선물산장려운동 취지문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또 의지하여 살 것이 없으면 우리의 생활은 파괴 될 것이라. 우리가 무슨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또 참으로 사람다운 발전을 희망할 수가 있으리오. 우리 생활의 제일 조건은 곧 의식주의 문제 즉 산업적 기초라. 이 산업적 기초가 파멸을 당하여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으며 그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사람으 로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이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문 제가 되는 것이 곧 이 의식주의 문제 즉 산업문제이니, 그러면 오늘날 우리 조선사람이 이 문제에 대한 관계가 어떠한가.


여러 가지로 통계를 들지 아니하거니와 우리의 입을 옷을 스스로 돌아보고 우리의 먹은 음식을 스스로 살펴보고 또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돌아보라. 그 중에 어느 것이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이고, 우리의 힘으로 산출한 것인가. 그 모든 것이 전부 남이 지어 놓은 것을 우리가 우리 집을 팔고 땀을 팔고, 또 마지막에는 우리의 몸뚱이를 팔아서 사다 놓은 것이 아니면 사다 쓰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을 집과 땅과 또 몸 뚱이까지를 팔아서 남의 손에 공급을 받으면서도 그대로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강산에 몸을 부치고 집을 지키어 살아갈 수 있을까. 산업적 기초가 파괴당하면 그 생활, 그 생명, 그 인격이 따라서 파괴를 당하는 것이 필연한 사실이라 하면, 우리는 이와 같은 조선사람의 경제적 상태는 곧 우리 모든 조선사람을 모두 멸망의 구렁텅이로 넣는 것이라 하노라…


부자와 빈자를 물론하고 우리가 우리의 손에 산출(産出)의 권리생활의 제일 조건을 장악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우리 생명인격사회의 발전을 기대하지못할지니, 우리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 조선사람의 물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이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첫째, 조선사람이 지은 것을 쓰고 둘째, 조선사람은 단결하여 그 사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기를 목적하노라. 이와 같은 각오와 이와 같은 노력이 없이 어찌 조선사람이 그 생활을 유지하고 그 사회를 발전할 수가 있으리오.































내 살림 내 것으로


보아라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제일 세상에 무섭고 위태한 일인줄

오늘에야 우리가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일이다.

입어라! 조선사람이 만든 것을.

쓰라! 조선사람이 지은 것을.

서울 견지동 18번지

조선물산 장려회


조선사람 조선 것








1923년 2월 13일~14일까지 충남 예산청년회가

금주·금연과 조선물산장려를 촉진시키기 위해 만든 선전문


조선물산산장려운동을 확산시키기위해 서울지역에

배포한 선전문















조선물산장려회정기대회




조선물산장려회 간담회 광경












토산애용부인회의조선물산장려운동














1923년 9월 1일 안동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장려대회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선전한 신문삽화















물산장려 돌잡이

([동아일보]1924년 2월 4일자)



'내 살림 내 것으로'

([동아일보]1924년 1월 자)











평양지역 조선물산장려운동













































평앙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던 조만식




'조선사람 조선것'이라는 표어 아래 평양의 조선물산장려운동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음을 보도한 신문기사([조선일보]1929.2.13)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선전표어와 선전포스터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선전행렬














일제 경찰의 감시하에 치루어지고 있는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악대행렬




























선전기 행렬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10주년 기념 선전포스터











조선물산장려가



흥일사에서 조선물산으로 만든 해동저를 이용해 줄 것을 요청한 선전광고([조선일보]'29.5.10)



'우리가 만든 것을 우리가 쓰자.'라는 표어아래 태극성을 사용하자는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선전광고





















전국의 여학교 학생들이 조선물산장려를 이해 개최한 전조선여학교연합바자대회 광경.이 대회는 서울여자기독교청년회와 조선일보사 공동 주최로 1926년 제1회 대회부터 1929년 제4회 대회까지 성황리에 개최되어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확산시켰다.



















조선물산장려를 목적으로 1930년 4월 24~26일 3일간 종로 YMCA회관에서 거행된 제3회 조선물산바자대회 광경.이 대회는 중앙기독청년회 주최와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1928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한 차례씩 3회까지 개최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 [산업계]와 [조선물산장려회보]













조선물산장려운동 지방조직 단체상황




























































































단체명


지역


조직일시


발기주체 및 목적

진주자작회

토산장려회

소비조합

친우회

조선물산소비조합

소비조합

자조회

토산장려회

자조회

토산장려회

삼익조합

자작회

소비조합

공영조합

소비조합회

우리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영암진흥회

동약회

생활개선회

물산장려회

조선토산장려회

물산장려회

자작회

삼교교풍회

토산장려회

조선물산장려회

서하혁신회

물산장려회

토산장려회

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우리물산장려회

소비조합

동약회

물산장려회

토산장려회
경남 진주

함북 함흥

함북 성진

강화군 동천면

인천

평북 덕안

경남 하동

부산

충북 영동

전북 남원

충북 청주

전남 무안

경남 고성

함북 웅기

의주군 북면

대전

평북 의주

전남 영암

평북 정주

평북 의주

황해 금천

춘천 사북면

경북 경주

경남 외령

명천군 하고면

사천

안동

황해 송화

경남 밀양

함남 북청

경북 경주

평북 신의주

황해 재령

전남 순천

평북 영변

평북 태천

삼호


1923. 1. 6

1. 9

1. 11

1. 15

1. 15

1. 23

1. 20

2. 5

2. 5

2. 6

2. 9

2. 10

2. 12

2. 12

2. 14

2. 15

2. 17

2. 19

2. 20

2. 20

2. 21

2. 23

2. 24

2. 25

2. 26

2. 26

2. 27

3. 2

3. 2

3. 2

3. 4

3. 4


3. 6

3. 8

3. 12


천도교유지·산업조합

30여 명 유지가 조직

조선물산장려

고갑희 외·단주단연과 토산장려

인천청년주최

유지·조합내 직조공장설치

읍내유지·각면 지분회설치계획

30여 단체대표유지·토산장려

조병구 외·금주단연과 토산장려

장날이용 회원이 토산장려 선전

청주인사·소비조합 토산장려

지도면유지

고성군 유지발기

웅기청년유지·물산장려와 절약

토산장려 결의

대전유지

의주기독교남녀청문회

토산품장려·금주단연

토산품장려·금주단여

유지·경제사상환기·자급자족

청년회주최

지촌리 유지

경주청년회·창로회·동아지국

김기진 등

하평동유지·조선물산장려

안동유지·(회장 : 김원진)

물산장려와 금주단연

밀양 4단체 외 유지동참·물산장려

신창군 유지 40여명

토산품이용

생활개선과 물산장려

재령읍내유지·토산애용선전

순천지방청년·생필품위탁매매

(회장 : 치희태)

유지·물산장려와 금주단연

삼호유지·토산상회조직





























































































단체명


지역


조직일시


발기주체 및 목적

함흥혁신회

경제자위회

노인계

친목계물산장려회

물산장려기성회

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홍농계의자강회

중교절약회

물산장려회

금주단연회

토산금주단연회

물산장려회

토산장려와 금주회

보원회

물산장려와 단연회

식신조합

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토산애용부인회

삼약회

물산장려회

건진회

물산장려회

민산조합

물산장려회

토요회

물산장려회

요원상점소비회

원산교풍회

금산소년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부인검약회

물산장려회

물산장려회
함남 함흥

함남

황해 서흥

경남 함양

전남포

평남 평원

평남

신화군 간동

전남 담양

경남의령

함남 신상

평남 곡산

평남 용강

하와이

평북 정주

황해 재령

경주군 서면

평북 태천

평원군 평원읍

평북 의주

평북 의주

경남 창녕

백마

창평

평북 강계

평북 안주

평북 의주

강계

동래

평남 덕치

함남 원산

전북 금산

평남 순천

전북 군산

평북 삭주

경남 삼량진

평남 수안


3. 13

1923. 3. 13

3. 15

3. 16

3. 17

3. 17

3. 17






3. 17

3. 18

3. 18

3. 19

3. 20

3. 24

3. 27










3. 30

3. 31

4. 13

4. 13

4. 16

4. 19

4. 21

4. 21

4. 23

5. 9

6. 14

9. 30

1924. 2. 6

2. 24

3. 8

1925. 7. 2

7. 15

9.17



유지들·토산장려와 금주단연

유지·물산장려와 경제사상고양

물산장려와 금주단연

상등의 친목계원·물산장려

진남포유지 30여 명

평원군 유지

황주청년회·물산장려대선전

간동유지



홍농계·절약 토산장려 단연단주

토산장려·단연단주


신평시유지·물산장려실행부설치

용강계해회 및 동아, 조선분국

조선인민회·본국물산장려

초장동유지·토산장려와 금주

청수리유지·토산애용과 단연

건천리사업연구회·물산장려

검안리유지·물산장려와 금주단연

평원읍유지

유지·물산장려

하동부인·토산애용

창녕청년회·소비절약


물산장려목적(부인참가)

강계유지·산업조합조합원강조

안주군유지·국산장려 및 절약

고관면유지·물산장려

강계기생·토산사용 철저히

유지·물산장려 선전

토산장려·풍속개량·소비절약

국산존중

금산청년회 소년부

물산장려·조선중앙본부제작

군산기독청년회

삭주읍예수회·토산장려와 절약

삼량진 유지30여 명





국채보상운동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왼쪽)과 김광제

(오른쪽)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양기탁.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 삼가 아룁니다. 무릇 신민이 충으로 행하고 의를 숭상하면 이로써 그 나라는 흉하고 백성은 편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의가 없으면 이로써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음이라. 뿐만아니라 오늘의 구주(歐洲)에서도 부강한 나라와 멸망한 나라들의 역사는 모두가 충의를 소중히하고 숭상하는지 여하에 기인하는 바라 ……


근세 역사를 보건데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진멸한 에집트나 월남, 폴란드 등의 국민은 모두가 단지 자기 한몸과 자기 집만은 알 뿐, 군주나 국가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인 즉, 이는 자함자멸(自陷自滅)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열심하여 충의를 분발할 때가 아니리오……


지금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이를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 추세이라.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 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 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죄기 못할 것이라. 국토란 한번 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어찌 월남 등 멸망한 민족의 꼴을 면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다. 2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사람이 한 달에 20전씩 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것이라……


아! 2천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가 있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은 부치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원하노니, 대한의 신민과 여러 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여 알려서, 모르는 이 한 사람도 없게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명(聖明)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유지하기를 천만행심 이로다.

































반지.팔찌.목걸이 등의 금은패물폐지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활동장소(대국광역시 중구 남일동 진골목 자리)










경고 아(我) 부인 동포라


우리가 함께 여자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의(三從之義) 외에 간섭할 사무가 없사오니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2천 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代錢)을 구취한다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감동케 할지요 진정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니 부인을 무론(毋論)한다니, 대저 여자는 백성이 아니 며 화육중(化育中) 일물(一物)이 아니리오.


본인 들 여자의 소처로 일시소존(一身所存)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河海)가 가는 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로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나리, 유지하신 부인동포들은 다소를 불구하고 혈심 의연하여 국채를 청장(淸帳)하심이 천만행심(千萬幸甚).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가를 위해 1907년 2월 23일 전국 여성들에게 발표한 격문)






























국채보상운동을 처음으로 발의하고 주도했던 대구광문사 자리

(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 수창초등학교 후문 대성사 자리)












국채보상 기성회 발기문



지난날 우리 정부가 진보에 급급하여 들여온 국채가 1300만원이라. 그 마음에 어찌 차관으로 돈을 불려서 국가의 대사업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오늘에 우리 2천만 동 포들이 가령 한 사람이 1원을 낸다면 2천만원이요, 50전씩이면 1천만원이니, 백성들이 진 빚을 갚는 일이 어찌 불가능하리오……


지난날 보불(普佛)전쟁 때 불란서 국민은 의연금 출연자가 수십 수백만이었고, 또한 집집마다 한 개씩 놋숟갈을 공납했으나, 수백만개의 숟가락에 그 많고 적음과 가볍고 무거움이 어 찌 곡 같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그 국민이 함께 나라를 부축하자는 마음은 꼭 같은 것이라. 이에 본인 등은 멀리 동래·대구의 여러분들과 뜻을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단합일체하여 회 (會)를 만들었으니, 이름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라. 이에 우리 동포는 포고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라노니, 아! 국가가 망하면 국민이 망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여 열심히 하옵시다. 그리하여 뒷날을 기다려 국채를 깨끗이 청산한 연후에 세계 제일의 향기 롭고 좋은 담배 수천만 잎을 구입하여, 온 나라 남자·여자·젊은이·오른 모두가 내뿜는 담배바람 속에서 맑은 날의 흥취를 돋우어 봄이 어떠 하리오.






(국채 보상기성회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자극받아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김성희·유문상·이필상·김병주·오영근 등 24명의 인사가 발기한 단체이다. 이외에도 같은해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이종일·김광제·박용규·서병규·이면우 등이 발기하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만들어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민족의 경제투쟁과 독립운동 자금후원활동

채보상운동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 하기위해 정치·군사적 침략과 아울러 경제적 침략을 단행하므로 이에 대항해 경제적인 자주권을 회복하여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와 을사5조약 등을 통해 한반도에서 정치·군사적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은 한국의 경제를 식민지화 하기 위해 차관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일부채는 4,500만원에 달하였다.


이런 막대한 차관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 하는데 사용될 일체의 식민지 건설비용을 모두 한국정부에 전가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이와 같은 차관의 이면에 담긴 일제 침략성을 심각히 깨닫고 우리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부채를 갚아 민족 의 생존권을 지켜나가기 위해 일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어 외채를 갚자는 운동으로 대구 광문사의 서상돈과 김광제를 중심으로 발의 되었다.


1907년 2월 21일 대구 군민대회를 통해 본격적인 국채보상운동의 닻을 올리자, 전국 각지와 국외에서 그 취지에 찬동하면서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남성들은 담배를 끊은 돈으로 국채보상운동 의연금모집에 동참했고, 여성들은 솔선하여 금·은 패물을 처분하여 동참했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경향신문』등 국내 언론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적극 선전하여 확신시켰고, 특별히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은 이 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앞장섰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활발히 전개되자 일제는 이 운동의 확산을 막기위해 민족언론을 탄압하고,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시키는 등 교묘하게 탄압하였다.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1908년부터 운동의 열기는 쇠퇴하였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경제침투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민족경제를 보호하여 국권을 지키려한 강력한 항일민족운동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일제 및 외새의 침략과 경제수탈











▲ 청일전쟁시(1894)청군의 한인 학살과 수탈 삽화([The Graphic]1895.3.9)















▲ 경제수탈에 앞장섰던 한말의 주한외국공간원들














▲ 러일전쟁을 치루기 위해 부산에 들어온 일본 군인들


































▶ 러일전쟁시 일제가 한국내 군수물잘 징발을 위해 남발했던 군용수표






▲ 한국에서 벌목한 목재로 군용도로를 건설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














▲ 일제가 식민 수탈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

























▲ 경부선 철도부설을 위해 현지 측량에 나선 일본인 측량대.일제는 한국에 대한 경제수탈과 군사침략을 강화할 목적으로 경부선 부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 일본군인에 의한 한국인의 강제 사역







▲ 공장에 동원된 어린 소년들의 집단작업





























▲ 일제 토암부가 대한제국 탁지부에 압력을 가해 백동화를 무효화 시킨'구백동화무효에 관한 고시'(1909.11.1)와 백동화. 일제는 대한제국 에서 주조한 백동화 대신 일본 제일은행 발행 지폐를 강압적으로 사용하게 하여 경제침투를 원활히 하였다.





▲ 일제가 금융권 장악을 위해 설립한 조선은행





일본인 상공인의 기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18년 10월에 설립된 조선식산은행















▲ 일제의 경제수탈 본거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 미국인의 금광 채굴 광경과 미국 동양광업히사가 운영한 운산금강.

이 금광은 1939년 그 소유권이 일제로 넘어갔다.











시금채취에 열중하고 있는 독일인 ▶



▲ 일제가 일본인들의 상업진작을 위해 대구에 설립한 상품진열관(위)와 서울에 세운 상업 박물관(오른쪽)














▲ 일제가 벌목한 목재를 처리학 위해 신의주에 설립한 목재 제재소















▶ 황해도 겸이포에 있는 일본 삼릉 제련소




▲ 황해도 수안에서 시금채취에 혈안이 된 일제














평양에 있는 일제 총독부 직영 광산






함경남도 가산에 있는 일제가 경영한 구리광산















▲ 일제가 한국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군산항에 쌓아둔 광경















▲ 수탈한 면화를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목포항에 쌓아 둔 광경




한말의 생활상









한말 한인의 표정

















▶ 거리에서 아이들의 모습







▶ 즐거운 동심






▶ 평범한 가정의 모습






















▲ 개항후 변화된 서울 거리

▲ 개항초기의 서울 거리










한말의 노동현장













▲ 물레짓는 아낙네

























▲ 우물물을 담고 있는 물지게꾼

▲ 짐을 기다리는 지게꾼











한말의 노동현장












공동 삽질을 통한 도로개수 작업














▲ 갓을 만들고 있는 기술자




▲ 목재 제재작업











한말의 서당교육













▲훈장과 학동들의 수업광경













근대식 교육
















1909무렵 전주 신흥학교 수업광경 ▶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 교사와 학생











한말의 교통












▲ 인력거
















가마를 탄 양반 마님의 나들이






사람이 밀어서 운행된 인력궤도차














서울의 전차











한말의 상업활동














짚신장사


















옹기장수






서울의 싸전거리












한말의 상업활동













▲서울 소공동에 있던 사진관















▲대구 서문시장












한말의 상업활동


















▶ 보부상들로 조직된 상무사가 발행한 1899년

5월 4일자 [상무총보]. 이 신문은 상무사원들을

대상으로 각종 소시과 물가정보 등 원활한 상업

활동을 위해 만들어졌다.

(신세계상업박물관 제공)


보부상임을 표시한 보부상 신표

(신세계상업박물관 제공)
















▲1897년에 발행된 대조선보험회사의 보험 영수증.(신세계상업박물관 제공)












일제의 금융침략에 대항하여 설립된 민족계 은행















1897년 2월 19일 창립된 한성은행

(현 조흥은행 전신)






1897년 1월 30일 창립된 대한천일은행

(구 상업은행 전신.현 한빛은행)이 건물은

1909년 신축된 금융기관 중 가장 오래된것으로

현재 한빛은행 종로지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1899년 1월 22일 대한제국 탁지부에 제출한

대한천일은행 설립청원서, 한국인의 자본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임을 확인시켜주는 가장 오래된 공식문서이다.


외국인 전당포 이용을 삼기고 우리 민족이 설립한

은행을 이용해 줄 것을 요청한 대한 천일은행 광고

([황성신문]1901.12.3)






본 은행사무소에서 상당한 부동산 저당대출을 예정이오니, 여러분께서는 잘 생각하시고 외국인 전당포로 가시지 말고, 본 사무소로 오셔서 상담하여 주십시오.

천일은행 사무소










일제의 금융침략에 대항하여 설립된 민족계 은행


















은본위 화폐제도를 채택한 1891년'신식하폐조례'

제정후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태한지폐





▲ 한말에 통용되었던 수표와 어음






15세기부터 한말

까지 통용되었던

상평통보






상평통보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

대동은전















신식화폐제조를 위해 1892년에 준공된 인천전환국




발간사

항이후 우리 민족은 밀려오는 외세의 정치·경제적 침략과 수탈에 대항하면서 자주적이고 근대적인 독립국가를 수립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민족은 반봉건·반외세의 민족운동인 동학 농민운동전쟁을 비롯하여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의병전쟁, 독립협회·신민회 활동 등을 통한 근대적인 개혁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시기에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학생·노동·농민운동, 각종 항일무장투쟁 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추진하였습니다.


한민족 경제투쟁 특별전은 한말부터 일제시기까지 전개된 일련의 독립운동 가운데 특별히 경제적 민족운동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주요 내용은 한말의 생활상 중 민족경제건설 움직임과, 군사적 억압에 의한 일제 및 외세의 경제수탈, 이런 가운데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조선물산장려운동 등의 경제투쟁으로 되어있습니다. 동세에 어려운 경제생활 중에서도 자금을 모금하여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국내외 한인들의 활동을 통해 그 의의를 되새기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 민족수난의 시기에 보여 주었던 선열들의 경제투쟁정신은 오늘날 경제난국에 처해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민족적 의지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경제도약의 힘을 제공해 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이번 특별전을 위해 자료를 협찬한 명지대·LG연암문고와 후원을 한 상업은행(현 한빛은행), 그리고 촬영에 협조해 주신 여러 자료소장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국채보산운동 92주년을 기념한 이번 전시도록이 발간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대구광역시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99 . 8


박 유 철



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을 재조명한 '한민족 경제 투쟁 특별전' 도록을 발간하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우리 대구의 선각자이신 서상돈선생께서 김광제선생과 함께 애국계몽단체인「대구 광문회」에서 '일본 차관 1,300만원으로 인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으니, 담배를 끊어서라도 국채를 갚아 국권과 국토를 보존하자' 고 건의하고, 2월 21일 지금 시민회관 자리인 북후정에서 '국채보상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그 당시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이국만리의 해외동포들까지도 흔쾌히 참여한 경제적 독립저인의 발현이었습니다. 이 비폭력적 항일정신은 민족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항상 국가발전을 선도해온 우리 대구인의 올곧은 정신적 기반으로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오늘 이 도록 발간을 계기로 다가오는 새 천년을 이끌고 갈 우리 후손들에게 지나온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거울로 삼기를 바라면서, 귀한 자료를 흔쾌히 제공해 주신 독립기념관과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신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1999. 8


대구광역시 시장 문 희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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