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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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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작성일 : 2019-06-11 조회수 : 542 시어록비 사진.jpg

시어록비 사진 전경

일제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 각국 공사관, 그리고 국민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827년 6월 2일 홍천 현감을 역임한 조유순과 대구 서씨를 양친으로 서울 회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출사 전까지 경기도 가평에서 지냈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이다. 185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87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1889년 한성부윤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 1893년 의정부 좌의정을 역임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가평에 은거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무력탄압을 반대하였고, 을미사변 이후 1896년에 19개조의 차자(箚子)(상소의 일종)을 올려 의병을 효유하되 토벌하지 말 것 등 폐정개혁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1905년 11월 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고종에게 조약의 파기와 5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민영환, 이상설 등 백관을 이끌고 입궐하여 연명 상소하였다. 선생은 영국, 독일, 미국, 이탈리아 등 5개국 공사들에게도 늑약을 부인하는 성명을 낼 것을 호소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상소항쟁을 계속하는 선생을 체포하여 일본 헌병주재소에 구속했다가 이튿날 석방하였다. 선생은 석방되자마자 표훈원에서 다시 상소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지만 일본헌병대에 의해서 제지당하였다. 더 이상 상소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자 선생은 고종과 각국 공사관, 그리고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1905년 12월 3일자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에 선생의 순국 소식과 함께 유서 전문이 게재되어 이후 활발히 전개되는 국권회복운동에 자극과 격려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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