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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박기성 (朴基成, 1905-1991)
작성일 : 2015-10-16 조회수 : 3,144 박기성 장군 어록비.jpg IMG_1480.jpg

박기성 장군 어록비 전경

IMG_1480 전경

국내와 일본, 그리고 중국 등지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 확고한 독립정신을 갖고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905년 6월 1일 충북 진천 문백면 봉죽리에서 부친 박문용과 모친 연철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10일 도안면 광덕리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어린 나이에 참가할 정도로 항일정신이 특출하였다. 19세 때인 1924년 신학문을 배워 실력을 키우기 위해 외삼촌 연동희를 찾아가 일본 갈 여비 40원을 얻어 일본으로 유학가 일본 도쿄의 개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자유청년연맹과 흑우연맹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중국으로 망명은 선생은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이전 일본에서 활동하던 것과 같이 무정부주의 단체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강력히 저항한 항일운동 단체였다.

선생은 난징에서 잠시 중국포병학교에 입학해 훈련을 받았는데 같은 아나키스트인 유자명의 도움으로 1934년 3월 중국국민당 남경정부가 설립한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1기로 입학하였다. 1937년 졸업 후 중국 본토를 침략한 일본군에 대항해 중국국민당군의 장교로 항일전쟁에 참여하였다.

1939년 11월 충칭에서 대장 나월환과 대원 30여 명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한국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뛰어들었다. 1940년 5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시안으로 이동해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한인 청년들을 초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집된 한인청년들은 시안에 설치된 한국청년훈련반에서 일정 기간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교육을 받아 정식 대원으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해서 대원이 100여 명으로 확충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이듬해(1941년) 1월 1일을 기해 박기성을 비롯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모두가 한국광복군에 편입해 광복군 제5지대로 편제되었다. 해방 때까지 장군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보참모부장 등 여러 간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일본의 패망으로 조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12월 28일 환국하였다. 1946년 3월 20일 육군군사학교 제3기 특별반으로 입교하였는데 이 때 한국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 박시창과 함께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사단 5연대장, 101사단장 등으로 활동하다 1960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군 예편 후 선생은 1969년 한국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구성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참여해 생생한 독립운동의 체험을 역사로 남기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독립운동 선양사업에 힘쓰셨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군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1991년 서거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선생의 부인인 심근순 여사를 비롯해 장남 박용수 교수 등 4남매가 있다. 일생을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정신은 어록비 속에 잘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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